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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바빌론 문명의 관계, 그리고 떠오르는 페르시아 본문
이집트와 바빌론 문명 : 협력과 경쟁의 역사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각각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에서 번성한 두 위대한 문명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국경을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외교, 경제, 문화, 군사적 상호작용이 그들의 역사를 큰 변화와 발전을 이룩하게 했습니다. 아마르나 서신(기원전 14세기)은 외교적 협력을 강조하고 카르케미시 전투(기원전 605년)는 그들의 군사적 충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가 단순한 동맹도 아니고 영원한 적도 아니라 역동적이고 진화하는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1. 외교와 정치 : 왕들의 편지와 동맹 관계
아마르나 서신(기원전 14세기)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간의 외교 교류에 대한 흔적을 제공합니다.
아케나톤 vs. 부르나-부리아시 2세
아마르나 서신(기원전 14세기)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간의 외교 교류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 바빌로니아 왕은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아케나텐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거리두기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 버나부리아쉬 2세는 "이집트는 바빌로니아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 정치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무역 관계는 계속되었고, 이집트는 금과 린넨을 공급했고 바빌로니아는 은과 말을 보냈습니다.
투트모시스 3세 vs. 카시트 왕국의 왕(부르나-부리아시 1세?)
기원전 15세기에 이집트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였던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의 영향력을 레반트로 확장하여 바빌로니아의 활동을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의 팽창을 위협으로 여겼고, 미탄니족 및 히타이트족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의 영향력을 상쇄하려고 했습니다.
- 긴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대신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바빌로니아는 이집트로부터 금과 직물을 수입한 반면, 이집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귀금속과 말을 받았습니다.
2. 경제적 관계: 활발한 무역과 기술 교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각각의 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상호 이익이 되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무역 품목과 상호 의존성
이집트에서 바빌로니아로 수출된 주요 품목:
- 금과 보석: 이집트의 풍부한 금광 덕분에 이집트는 귀금속의 주요 공급국이 되었습니다.
- 아마포(린넨 패브릭): 바빌로니아에서는 고품질 이집트 린넨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파피루스와 향료: 파피루스는 글쓰기에 필수적이었고, 향은 종교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집트로 수출된 주요 품목:
- 은과 구리: 바빌로니아는 아나톨리아와의 무역을 통해 이집트에 은과 구리를 공급했습니다.
- 석유(역청): 이집트 미라화 및 건축 자재에 사용됩니다.
- 말과 곡물: 바빌로니아의 말은 이집트의 전차 부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곡물은 이집트의 식량 공급을 지원했습니다.
기술 및 지식의 교류
무역 외에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기술적, 지적 발전을 교환했습니다.
- 건축 기술: 이집트 피라미드 구조와 바빌로니아의 진흙 벽돌 건축 기법은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 수학과 천문학: 바빌로니아의 60진법 수학 체계와 기하학적 원리는 이집트 건축과 토지 측량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 관측은 이집트의 달력 개발과 시간 기록에 기여했습니다.
3. 군사적 충돌 : 신바빌론과 이집트의 경쟁
네부카드네자르 2세 vs. 네카우 2세
기원전 7~6세기에 바빌로니아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으로 부상하면서 이집트와의 군사적 충돌이 증가했습니다.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느부카드네자르 2세는 파라오 네초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레반트에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을 확보했습니다.
이집트는 레반트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시도했지만 바빌로니아의 확장으로 인해 이집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바빌로니아는 유다를 정복하여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을 시작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라이벌 관계였지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곧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부상이라는 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6세기, 바빌로니아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이집트와의 군사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느부카드네자르 2세는 파라오 네초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레반트에서 바빌로니아의 지배력을 확보했습니다.
- 이집트는 레반트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시도했지만 바빌로니아의 확장으로 인해 이집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이후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바빌론 유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 비록 그들은 라이벌 관계였지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두 나라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부상이라는 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4. 최후의 승자는 페르시아
오랜 경쟁과 협력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결국 페르시아 제국에 함락되어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에 의해 정복되었고, 기원전 525년에는 이집트마저 **캄비세스 2세(Cambyses II)**에 의해 연이어 정복당하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로써, 오랜 기간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공통된 운명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5. 결론: 협력과 경쟁의 복합적 관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단순히 라이벌이나 동맹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외교, 경제, 군사 상황을 반영하여 발전했습니다.
- 외교적 협력 – 아마르나 서신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왕국은 동맹과 무역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경제적 교류 –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의 금과 직물에 의존한 반면, 이집트는 바빌로니아의 은과 말로부터 혜택을 받았습니다.
- 문화적 영향 – 두 문명은 천문학적 지식, 수학적 발전, 건축 기술을 교류했습니다.
- 군사적 충돌 –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는 레반트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고, 이는 바빌론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 공동된 몰락 – 궁극적으로 두 문명 모두 페르시아 제국에 함락되어 독립이 끝났습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상호작용은 고대 세계에서 경제적,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맹과 경쟁이 변화했던 국제 관계의 유동적인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서로 강력한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파트너이면서도, 때로는 군사적 경쟁자로 충돌한 관계로서 성장하였습니다.